22대 총선 본 투표 날인 10일 오전 11시 30분,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 상임공동대표가 혜화동 제3투표소인 혜화아트센터에서 ‘기어서 투표’했다. 박 대표는 활동지원사와 활동가들의 지원을 받아 투표소 입구에서 기표소까지 기어갔다. 기표소에 도착해서는 바닥에 누워있는 박 대표의 높이에 맞게 선거관리위원회 직원들이 비장애인의 높이에 맞춰져 있던 기표소 가림막을 바닥으로 끌어 내렸다. 박 대표는 투표용지를 바닥에 두고 기표소 가림막 안에서 혼자 ‘비밀 투표’를 했다. 기표 후, 그는 다시 투표함까지 기어가 바닥에 누운 채로 투표함에 투표용지를 직접 넣었다.

박 대표는 이러한 방식을 ‘포체투지(기어가는 오체투지)’라고 칭했다. 그는 “포체투지는 ‘장애인시민권’에 대한 간절함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중증장애인은 길 수밖에 없는 신체적 구조를 갖고 있어 이 방식을 선택한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장애인도 시민으로 이동하는 시대로”라고 적힌 주황색 몸피씨를 입고 있었다.

- “‘기어서 투표’하는 행위가 소란? 선관위와 경찰, 인권위에 진정할 것”

전장연은 지난 5일과 6일, 이화동주민센터에 기어서 사전투표를 하러 갔으나, 종로구선거관리위원회(아래 종로구선관위)와 혜화경찰서에 의해 저지당했다. 5일에는 종로구선관위가 ‘기어서 투표를 하는 행위는 소란행위에 속하며, 장애인권리에 투표해달라는 언동은 특정 정당이나 후보자를 지지 또는 반대하는 언동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막아섰다. 6일에는 기어서 사전투표소까지 갔으나 ‘장애인복지카드’가 신원을 증명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그러나 공직선거관리규칙에 따르면 장애인복지카드는 선관위가 인정하는 신분증명서에 해당한다.

‘포체투지’ 투표에 앞서 11시에 열린 기자회견에서 이승헌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활동가는 “이동권이 보장되지 않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장애인 유권자가 기어서 투표소로 가는 것이 어떻게 위법행위인가. 투표하러 가는데 그걸 막는 게 위법행위 아닌가? 보는 시민들이 불편하니까 기어서 투표하는 행위를 소란행위로 간주하는 그 자체가 위법행위이다”고 말하며 “혜화경찰서와 종로구선관위가 장애인 유권자의 참정권을 방해하는 행위는 명백하게 헌법, 장애인차별금지법, 공직선거법 위반이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은 사전투표를 저지한 종로구선관위와 혜화경찰서를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할 예정이다.

- 기어서 투표하러 가니 “어서 휠체어 타라” 언성 쏟아져

오전 11시 30분, 박경석 대표가 혜화동 제3투표소인 혜화아트센터 앞에 누웠다. 그러자 그의 주변을 경찰과 종로구선관위 측이 둘러쌌다. 경찰은 “투표소 100m 이내에서의 투표 권유 행위는 허용되지 않는다”고 목소리 높여 말했다. 박 대표가 “‘장애인도 시민으로 이동하는 시대로’라는 글씨와 투표 도장 모양이 함께 그려진 피켓을 드는 것이 투표 권유행위에 해당하느냐”고 투표관리관에게 묻자, 투표관리관은 “해당 피켓은 투표를 호소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답했다.

박 대표는 “‘장애인도 시민으로 이동하는 시대로’가 적힌 몸피씨를 입는 것은 괜찮냐”고 다시 한번 물었다. 이에 투표관리관은 “해당 몸피씨를 입고 ‘포체투지’하는 것은 허용된다”고 했다. 투표관리관은 “기어서 투표하러 가는 행위는 소란행위가 아니지만, 이를 취재하는 것은 투표 방해 행위에 해당할 수 있다”고 말하며, 기자들에게 다른 유권자의 투표를 방해하지 말 것을 지시하기도 했다.

박 대표는 피켓은 뒤집어 바닥에 깔고 몸피씨를 입은 채 느리게 투표소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투표하러 가는 내내 “시민 여러분, 장애인도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라고 외쳤다. 그렇게 투표소까지 기어가는 동안 주변에서는 다양한 고성이 오갔다. 투표소를 총괄하여 관리·감독하는 현장의 책임자인 투표관리관은 느리게 기어가는 박 대표에게 “휠체어 타고 투표하러 가면 안 되냐”고 말하며 박 대표를 지속해서 쫓아왔다. 유권자들이 원활하게 투표할 수 있도록 투표 사무를 보조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투표참관인 또한 “투표하러 오신 분들도 똑같은 국민이다. 너무 민폐 끼치는 것 아니냐. 이 정도까지 하는 건 아니지 않느냐. 어서 휠체어를 타라”고 박 대표에게 언성을 높였다. 경찰은 사전투표 날에 이어 이날도 우발 상황 발생 시 장애인을 현행범으로 체포하기 위해 현장에 ‘장애인버스’를 동원하기도 했다.

포체투지 투표가 끝난 후, 박 대표는 “‘기어서 투표’하는 행위를 소란행위로 보는 시선을 보며, 장애인에 대한 차별적 인식이 만연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휠체어를 타고 투표할지, 기어서 투표할지는 장애인의 선택이다. 기어서 투표하는 행위를 막을 수 있는 법적 근거는 없다. 이러한 행위를 소란행위나 다른 유권자의 투표를 방해하는 행위로 취급하는 것이 마음 아프다”고 말했다.